팬들이 만들고 지켜낸 위대한 역사
우리는 멈추지 않습니다
이 때까지 한국 축구의 응원 문화는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유명 연예인을 중심으로 북과 꽹과리를 치는 정도였으며 프로축구는 구단에서 동원한 응원단장과 치어걸이 뽕짝(트로트) 음악에 율동을 곁들이는 수준이었다. 즉, "야구장 응원문화보다도 처진" 수준이었다. 여기에 모기업 직원들을 단체동원하는 경기의 경우 기업 체육대회를 연상케 하기도 했다.
1994년, 2002 월드컵 유치 신청으로 인해 하이텔 축구동호회에서는 무조건 일본을 이기고 월드컵을 유치해야 한다는 분위기로 달아올랐다. 축구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던 중, 동경만 하던 유럽축구 문화와 J리그 출범과 더불어 시작된 응원문화를 보면서 우리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 기존 축구장에 맞지 않던 응원문화를 버리고 유럽이나 일본과 같은 팬들의 자발적인 집단 응원을 도입하기로 결론 내린다.
* 90년대 축구 동호회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레즈고 팬커뮤니티 '옛날 이야기'의 양원석님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링크
1995년 초, 하이텔 축구동호회에서 일어난 새로운 응원문화를 만들자는 움직임에 동참하는 회원들이 점차 늘어났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이들은 여러 팀보다는 한 팀을 정해서 응원하자고 결정했다. 응원단장과 치어걸이 음악에 맞춰 응원을 지휘하는 LG치타스, 박종환 팬클럽이 장악한 일화천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유공 코끼리'를 선택하여 1995년 5월 6일 정규리그 개막전에서 국내 서포터 역사에 효시를 쏘아올렸다.
동대문파라 불린 이들은 유공의 홈경기장인 동대문을 비롯해 원정 경기 응원에도 나서며 전국적으로 서포터즈 응원문화가 전파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 팀은 추후 부천 유공, 부천 SK를 거치게 되며 이 팀을 응원했던 서포터 헤르메스의 기원이자 현 팀명인 '부천FC 1995'의 '1995'의 기원이 된다.
수원삼성이 창단되며 팬클럽에 대한 대폭적인 지원을 약속 받게 된다. 이 때 젊은 동대문파를 중심으로 수원삼성 팬클럽으로의 이탈이 있었다. 유공 응원단은 비교적 연령층이 높은 소수의 팬들만 남아 고군분투하며 시즌을 맞이하게 된다.
아직까지는 하나의 클럽만을 응원한다는 서포터 개념보다는 친목 목적의 프로축구 팬이라는 동질성이 우세하던 시절이었다. 부천 유공만 응원하는 팬들과 더불어 친분과 인맥에 따라 부천유공과 수원삼성을 동시에 응원하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이거나 여러 팀을 돌아가며 응원하며 지원하는 팬들도 있었다.
초대 응원단장(현재 개념으로는 콜리더)은 전명준
부천유공을 향한 팬들의 자발적인 응원은 동대문을 거쳐 목동에서도 이어졌다.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활약한 윤정환의 인기에 더불어 새로운 홈경기장인 목동에서도 점차 새로운 팬들이 생기기 시작하며 부천 시대의 시작을 열었다.
* 02-153-500-2002 전화동아리 방이 최초로 개설되었다.
국가대표팀 서포터 붉은악마가 만들어지며 국내에 서포터즈의 개념이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서포터의 규모도 점차 확대되어 갔다.
98 프랑스 월드컵 최종예선 일본전부터 응원가 "오~부천FC(현 오~나의 부천)"가 붉은악마 응원가로 차용되었다. 시즌 종료 후, 서포터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기존의 느슨한 모임이 아닌 체계적인 서포터 운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1997년 12월 회의를 가지게 된다.
여기에서 결정 된 사안은 다음과 같다.
한편, 이전까지 그래왔듯 축구단이 단순한 기업 홍보의 개념으로 운영된 방식보다 축구와 지역 연고, 팬 중심의 운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이러한 가치관의 표현으로 부천이 국내 최초로 응원가에서 기업명을 제외하였다.
시즌 전, 국내 최초로 12번째 선수인 서포터에게 헌정한다는 의미로 등번호 12번이 결번 처리되었다.
이밖에 새로운 시도도 많았다. 리그컵에서 국내 최초로 서포터가 단체로 어깨동무를 하고 좌우로 뛰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일명 '랄랄라'. 그 외에도 앞사람 어깨에 손을 올리고 경기장 관중석을 일렬로 돌아다니는 기차 퍼포먼스 역시 최초로 선보이기도 했다.
한번은 대전과의 원정경기에서 연장 골든골 패배 후 선수들이 서포터를 외면한 채 라커룸으로 퇴장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경기를 함께한 서포터를 무시하는 행동에 반발하여 다음 홈경기에서 단체응원을 중단한 것이었다. 이것이 국내 서포터 사상 최초의 응원 보이콧이다. 당시, 서포터가 응원을 시작하지 않자 주장 강철 선수는 전반전 경기 내내 서포터를 향해 응원해달라는 제스처를 수차례 보냈다. 이 정도면 서포터의 뜻을 보여줬다고 판단하여 전반 막바지부터 120%의 응원이 시작되자, 거짓말처럼 선수들은 지고 있던 경기를 역전시켜 승리를 선사하였다.
이 시기에 울트라스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부천의 상징인 'ULTRAS PUCHON'의 시작이기도 하다.
98년 10월, 2대 회장 이희천 취임한다.
지난 시즌부터 준비한 울트라 스타일의 응원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다. 야구장에서 쓰는 "!! !! XXX" 등 정형화된 응원 문화를 바꾸기 위해 "!!! XXX, XXX XXX" 등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에서 쓰는 일본식 유럽 응원가가 아닌, 국내에 도입되지 않았던 유럽 울트라스의 응원가를 도입하였다. 개막전에서는 자체 제작 홍염과 게이트기를 선보였으며, 걸개 또한 단순한 응원 문구가 아닌 서포터를 상징하는 문구 및 적/흑, 적/백/흑 위주의 동일하면서도 다양한 패턴의 20개 이상에 달하는 최다 대형 깃발을 도입하는 등 시각적 효과로 경기장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국내 최초로 안티콜을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하기도 했다. "XX XX 하하하!!"가 그것이다.
1999년 5월 30일 울산전 홈경기에서 후반 추가시간 이을용의 극적인 결승골로 승리하였다. 경기 종료 후 서포터에게 인사 오는 선수들을 향해 '랄랄라' 퍼포먼스를 선보이자 주장 강철이 이에 화답하여 선수들도 서포터와 함께 '랄랄라' 퍼포먼스를 하였다. 선수가 서포터와 함께 랄랄라를 한 것은 이때가 최초였으며, 이후부터 승리 후 퍼포먼스로 자연스럽게 정착되었다.
2000년 5월 5일 잠실에서 열린 대한화재컵 결승전에 천여 명에 가까운 서포터가 집결했다. 뜨거운 열기 속에 전남을 2대1로 꺾으며 우승을 차지한다.
같은 해 K리그 챔피언 결정전에도 진출하였으나 안양LG에게 아쉽게 패배하며 준우승으로 시즌을 마무리하게 된다.
목동 시절의 마지막이자 부천 시대를 준비하는 한 해였다.